조용한 듯 깊은, 김천의 시간 속으로
경북의 관문 도시, 김천.
KTX 김천(구미)역이 있어 빠르게 스쳐가기 쉬운 도시지만,
잠시만 멈춰 서서 걸어보면 이곳이 가진 역사와 사람, 그리고 음식의 깊이를 알게 된다.
신라 천년 고찰의 숨결이 살아 있는 직지사,
고대 감문국의 흔적이 남은 평야지대,
야경 명소로 변신한 연화지와 지역 특산물인 김천한우까지.
이 도시는 ‘조용한 고전’처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지금부터 김천이라는 책 속을 천천히 함께 펼쳐본다.
1. 직지사와 감문국 – 천년 고찰과 고대왕국의 흔적을 걷다
김천의 역사 여행은 단연 직지사(直指寺)에서 시작된다.
신라 눌지왕 418년에 창건된 이 사찰은
천년의 시간을 고요히 품은 공간이다.
차를 타고 수도산 자락을 따라 오르다 보면,
깊은 산속 절간이 불현듯 눈앞에 펼쳐진다.
사찰로 가는 길에는 기와지붕의 일주문이 먼저 맞아주고,
나무 사이로 비껴드는 햇살은 절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직지사의 이름은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대웅전 앞에 앉아 있으면
복잡한 생각이 자연스레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현존하는 문화재도 많다.
보물 제1570호 삼층석탑,
보물 제2083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그리고 고려시대 청동불상까지.
시간이 자연처럼 스며 있는 절이다.
이제는 사라진 감문국은 김천의 뿌리 같은 존재다.
삼국시대 이전, 진한 12국 중 하나였던 감문국은
지금의 김천 감문면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감문국 이야기나라, 감문국 역사공원에 가면
고대 유적지의 흔적과 전설이 전시와 조형물로 잘 구성되어 있다.
비록 성벽이나 궁궐이 온전히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 공간이 주는 상상력은 김천 여행의 또 다른 재미를 더해준다.
이처럼 김천은 신라불교문화와 고대 토착국가의 전통이 함께 공존하는,
그리 많지 않은 도시 중 하나다.
2. 연화지와 문화예술회관 – 도심 속 쉼과 감성의 여운
김천 도심 한가운데에는 작은 호수 하나가 있다.
이름하여 연화지(蓮花池).
과거 농업용 저수지였던 이곳은
지금은 김천 시민들의 대표 산책 코스이자
야경 명소로 자리 잡았다.
낮에는 잔잔한 수면 위에 오리떼가 노닐고,
밤에는 조명이 반사돼 연못 전체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특히 여름철 연꽃이 만개할 때 이곳은 말 그대로 ‘연화지’라는 이름을 증명한다.
주변에는 작은 북카페, 퓨전 한식당, 지역 공예품을 파는 소매점들이 있어
단순한 호수가 아닌 ‘문화의 거리’로도 발전하고 있다.
연화지를 중심으로 산책하다 보면,
소소한 김천의 정서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김천문화예술회관은
지역 예술 공연의 중심이다.
연극, 클래식, 전시, 시민 참여형 공연까지
김천 사람들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작지만 알찬 공연들이 자주 열리며,
김천시민뿐 아니라 외지 관광객에게도 열려 있다.
운 좋게 공연이 있는 날이라면,
저녁 일정은 이곳에서 마무리해보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다.
이처럼 연화지와 문화예술회관 일대는
도시의 ‘느린 감성’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서
김천 여행의 정서적 깊이를 더해준다.
3. 김천의 맛 – 한우, 국밥, 재래시장에서 만나는 식도락
김천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단연 김천한우다.
지리적 여건상 맑은 물과 넓은 초지에서 방목되는 한우는
육질이 부드럽고 기름기가 적당하다.
김천축산농협 한우프라자를 비롯해
평화시장 인근 한우구이 전문점들은
합리적인 가격에 질 좋은 한우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갈빗살, 치맛살, 업진살 등 부위별로 맛보는 재미가 있고,
곁들여 나오는 찬들 역시 지역 특산물 중심으로 정갈하게 차려진다.
식사 메뉴로는 한우국밥도 인기다.
맑은 육수에 푸짐하게 들어간 고기,
그리고 다진 파와 들깨가 어우러지면
그야말로 속이 든든해진다.
또 하나의 매력은 김천 평화시장이다.
이곳은 5일장이 서는 날이면 더욱 활기를 띠지만,
평소에도 지역민들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감 있는 곳이다.
시장 안에 숨은 국수집, 직접 두부를 만드는 반찬가게,
수제 어묵, 옛날 통닭집 등
한 끼 이상의 즐거움을 주는 먹거리들이 다양하다.
특히 김천막걸리와 함께 먹는 전은
단순한 음식이 아닌 지역 문화를 체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김천의 일상과 역사, 사람을 입으로 느끼는 경험이 된다.
4. 김천의 골목과 기차역 – 짧은 산책에서 피어나는 여행의 온기
김천에는 유명한 벽화마을이나 포토존 골목은 없지만,
도심 곳곳에는 시간이 남긴 ‘진짜 골목’이 많다.
특히 김천역 앞 구도심 일대는
오래된 여관, 옛날 다방 간판, 철길 건널목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진 한 장 없이도 기억에 남는 풍경을 만든다.
김천역은 지금도 운영 중인 역사(驛舍)지만,
예전의 모습을 많이 보존하고 있어
시간이 머문 듯한 느낌을 준다.
기차가 도착하고, 여행자가 내리고,
간단한 짐을 들고 나서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김천이라는 도시의 리듬이 느껴진다.
역 근처에는 오래된 분식집과 국밥집이 많아
기차 시간 전후로 간단히 식사하거나 커피 한 잔 하기에 좋다.
그리고 김천시가 진행 중인 역 주변 재생사업 덕분에
옛 골목과 현대적인 감성이 적절히 섞여
걷는 재미가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도심 산책이 끝날 즈음,
작은 서점에서 책 한 권을 고르고,
연화지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며,
이번 여행을 천천히 정리해보자.
그 순간, 당신은 ‘김천’을 ‘경유’한 것이 아니라
진짜 ‘경험’한 것이다.
결론: 스쳐 지나가기엔 아까운 도시, 김천
김천은 요란하지 않다.
대규모 테마파크도 없고, SNS에서 핫한 포토존도 없다.
하지만 그 대신,
천천히 걸으며 느낄 수 있는 시간의 깊이와
지역 사람들의 손끝에서 나오는 따뜻한 정성이 있다.
직지사의 나무 그림자,
감문국의 옛이야기,
연화지의 야경,
평화시장의 국밥 한 그릇.
이 모든 것은 단 하루 여행자에게도
길고 진한 기억을 선물한다.
다음 여행지로 김천을 선택한다면,
잠시 머무는 데 그치지 말고
도시의 맥박을 따라 한 템포 느리게 걸어보자.
그러면 어느새, 김천은
당신의 여행 노트 한 켠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