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감동이 있는 서산으로의 초대
사람이 붐비는 곳보다는, 조금은 한적하고 깊이 있는 곳을 걷고 싶을 때가 있다. 바쁘게 찍고 넘기는 관광지보다, 오랫동안 머물며 그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순간.
충남 서산은 그런 여행에 꼭 맞는 도시다. 화려하진 않지만, 조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읍성과 사찰, 그리고 천년 전의 불상이 미소 짓는 바위 하나까지. 그 모든 것이 겸손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 담백하면서도 강렬한 서산의 음식들이 더해지면, 이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진짜 ‘머무름’이 된다.
이번엔 직접 걸었던 서산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맛의 여정을 담아본다.
1. 서산 해미읍성 , 병인박해
서산 여행의 첫날, 나는 해미읍성부터 찾았다. 사실 처음엔 단순한 성곽일 거라 생각했다. SNS에서 봤던 사진처럼, 벚꽃이 흐드러지고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예쁜 풍경이겠거니 했는데, 막상 성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마을 전체가 성 안에 들어선 형태다. 조선시대 병영이 이곳에 있었고, 지금도 당시의 건물 배치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실제 그 시간에 살았던 사람들이 존재했던 공간이라는 사실이 이곳을 무게감 있게 만든다.
성문을 지나 마당에 서면, 무과 시험장, 관아, 병영 생활관, 그리고 천주교 순교자 기념탑까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곳이 단순한 군사 시설이 아닌, 삶과 죽음, 정치와 종교가 맞물려 있던 공간임을 느끼게 된다.
특히,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여행자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지금은 평화로운 잔디와 꽃들로 채워진 그 자리에, 누군가의 기도와 눈물이 쌓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조용한 성이 훨씬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성벽 위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주변 산과 마을, 그리고 고즈넉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서 마주한 서산의 첫 느낌은 ‘조용한 품격’이었다. 무엇 하나 크게 튀지 않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느낌. 여행을 시작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다.
2. 개심사 , 소나무길
서산에는 생각보다 사찰이 많다. 그중에서도 개심사는 특별하다. 굳이 유명 관광지로 분류하진 않지만, 오히려 그 조용함 덕분에 진짜 마음이 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나는 개심사를 가기 위해 서산 시내에서 약 40분 정도 차를 탔다. 작은 시골길을 지나고, 고즈넉한 숲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절집 입구에 도착하게 된다. 입구부터 길게 이어진 소나무길이 시작되는데, 이 길만 걷는 것도 하나의 여행이 될 정도다.
절은 작고 소박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천년을 훌쩍 넘는다. 백제 무왕 12년, 무려 612년에 창건된 이 사찰은 그동안 수차례의 화재와 복원, 시대의 풍파를 겪었지만 아직도 묵묵하게 산속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웅보전 앞에 앉아 있으면, 절집에서 흘러나오는 풍경 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만이 주변을 감싼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머릿속 생각들이 정리되는 것 같다. 특히 가을의 개심사는 정말 아름답다. 겹겹이 겹벚꽃과 단풍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사진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다.
내가 갔던 날은 늦가을의 끝자락, 붉은 잎이 절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낙엽 위를 걷는 소리조차 나지막한 기도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 나는 ‘여행 중에도 멈춤이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뭔가를 열심히 보고, 찍고, 남기지 않아도 그저 앉아서 바라보는 것으로도 마음이 채워질 수 있다는 것. 개심사는 그런 시간을 선물해줬다.
3. 서산 마애삼존불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상은 서산이라는 도시 자체를 대표할 만큼 상징적인 문화재다. 백제 후기에 조성된 이 불상은 ‘백제의 미소’라고 불릴 정도로 온화한 인상을 지녔는데, 실제로 보면 왜 그렇게 불리는지 단번에 이해가 된다.
나는 이곳을 가기 위해 새벽에 숙소를 나섰다. 사람 없는 시간, 조용한 산길을 걷고 싶었다. 불상은 산 중턱에 자연석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높이 5미터가 넘는 본존불이 중앙에 있고, 양옆에 협시보살이 함께 서 있다.
무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바람을 맞고 비를 맞으며 그 자리를 지켜온 이 불상은, 누군가에게는 종교의 상징이겠지만 나에겐 그 자체로 ‘시간’이었다. 무언가를 오래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 깊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불상을 정면에서 마주했을 때의 고요함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미소 하나가 많은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너도 괜찮다’고, ‘다 지나간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곳은 단지 역사 유적이 아니라, 마음을 만지고 가는 공간이다.
4. 어리굴젓과 간월도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단연 먹거리다. 서산은 내륙과 해안이 공존하는 지형 덕분에 다양한 지역 음식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어리굴젓이다.
처음엔 간단한 반찬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서산의 어리굴젓은 그 차원이 다르다. 짜지도, 비리지도 않고, 깊은 바다의 향을 간직하고 있다. 직접 간월도에 가서 먹어본 어리굴젓 백반은 정말 충격이었다. 단순히 반찬 한 접시가 아니라, 이 지역 바다와 계절이 응축된 맛이었다.
그날 함께 나온 메뉴는 굴밥, 생선구이, 조개국, 젓갈류까지 다양했는데, 하나같이 ‘조미료 맛’이 아니라 ‘자연 맛’이었다. 간월도는 작은 섬이지만 바닷길이 열릴 때는 걸어서 들어갈 수 있어, 이 자체도 하나의 여행 코스가 된다. 일몰 무렵의 간월도는 붉게 물든 하늘과 갯벌이 어우러져 정말 아름답다.
서산의 음식은 과하지 않고, 단순하지만 깊다. 그리고 그 맛 안엔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여행을 원한다면
서산은 떠들썩한 도시가 아니다. 그 흔한 테마파크도 없고, 고층 건물도 많지 않다. 대신 그곳엔 오랜 시간 무너지지 않고 버틴 돌담이 있고, 오래된 사찰과 성곽이 있다. 사람들이 잊고 살았던 '조용한 여행'의 미학이 살아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나는 풍경만 본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보았고, 마음을 돌보았고, 음식을 통해 사람을 만났다. 만약 당신이 진짜 여행, 마음이 가는 여행을 원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서산을 추천할 것이다. 여기엔 진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그곳을 찾는 이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다시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