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보통 제주 여행을 생각하면 해안도로와 바닷가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제주의 진짜 매력은 조금 더 안쪽, 바다와 한라산 사이에 위치한 중산간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이곳은 해발 200~600m 지대에 펼쳐진 완만한 구릉과 숲, 밭, 오름, 그리고 고즈넉한 마을들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공간입니다. 조용한 자연과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걸어봐야 할 중산간 올레길 3곳을 소개합니다. 이 길은 시끄러운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고, 사람보다 바람과 나무가 더 말을 걸어오는 장소입니다.
제주 올레 13코스 – 용수포구에서 저지리까지 (올레길 중심)
13코스는 제주 서쪽 끝 용수포구에서 시작하여 예술인 마을인 저지리까지 이어지는 약 15.5km의 코스입니다. 초반은 서해안의 바다와 함께 시작되지만, 곧 중산간 내륙으로 방향을 틀며 제주의 속살을 보여줍니다. 길을 따라 처음 마주치는 풍경은 어촌의 소박함입니다. 조용한 포구,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배들, 항구를 정리하는 어르신들. 이 정겨운 모습은 도심에서는 보기 어려운 여유로움입니다. 하지만 진짜 여정은 바다가 멀어지고 숲이 가까워질 때부터 시작됩니다. 중산간에 접어들면, 공기는 달라집니다. 짠내 대신 풀내음이 나고, 파도 소리 대신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걷는 길의 양옆엔 자연 그대로의 숲과 돌담길이 이어지며, 중간중간엔 오름 지형이 등장해 발걸음에 리듬을 더해줍니다. 나무들이 내리쬐는 햇살을 부드럽게 걸러내는 모습은 마치 천천히 숨 쉬는 숲의 품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코스의 백미는 종착지인 저지리 예술인 마을입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정착하며 만든 갤러리, 작업실, 조형물들이 숲과 어우러져 하나의 살아있는 전시장을 형성합니다. 갤러리를 구경하며 잠시 쉬어가고, 지역 예술가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도 색다른 재미입니다. 자연과 예술이 하나가 된 길,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느끼는 감정은 매우 깊고 조용합니다. 13코스는 올레길 중에서도 비교적 덜 알려져 있어 더욱 조용합니다. 번잡함 없이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진정한 ‘걷기 여행’의 감성을 느끼고 싶은 분들께 꼭 추천드리고 싶은 코스입니다.
제주 올레 14코스 – 저지리에서 한림까지 (숲길 중심)
14코스는 저지리에서 한림까지 이어지는 약 19km 코스로, 제주 중산간 특유의 숲과 들, 오름, 목장, 마을을 두루 체험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숲길 코스입니다. 시작점은 조용한 예술인 마을 저지리입니다. 전날 13코스를 걸었다면 이 마을에서 숙박 후 연계 트레킹으로 이어가기에도 훌륭한 코스입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이 길은 본격적으로 숲속으로 들어섭니다. 마치 누군가 손질하지 않은 채 오래도록 방치한 듯한 자연의 본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길은 때로 울퉁불퉁하고, 뿌리와 낙엽이 바닥을 덮고 있지만 그만큼 자연과 가까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중간 구간에는 청수리 숲길이 이어지며, 이곳은 사계절 내내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봄이면 야생화가 피어나고, 여름엔 짙은 녹음이 하늘을 가립니다.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억새가 발끝을 간지럽히고, 겨울엔 얼어붙은 고요함이 오히려 더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숲을 걸으며 만나는 오름 능선, 드문드문 보이는 밭과 돌담길, 염소와 말이 방목되는 초지. 이 모든 장면이 정지된 풍경화처럼 펼쳐집니다. 걷다 보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보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대화 대신 침묵, 음악 대신 바람 소리가 어울리는 길. 걸으면 걸을수록 자신을 비우고, 자연으로 채워지는 느낌을 줍니다. 종착지인 한림읍에 가까워지면 서서히 도심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이야기, 가게 간판. 숲의 정적과 대비되는 활기 속에서 걷기의 끝을 맞이할 때, 그 여운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제주 올레 15-B코스 – 한림에서 고내까지 (풍경 중심)
15-B코스는 공식 올레길 중 분기 코스지만, 중산간 걷기의 정수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숨은 명작 같은 길입니다. 약 13km로 구성된 이 길은 짧지만 밀도 높은 풍경과 감정을 선사합니다. 출발지인 한림은 이미 도시 분위기가 강하지만, 걷기 시작하면 곧 고요한 밭길과 시골길이 펼쳐집니다. 이 길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람 냄새가 나는 풍경입니다. 밭을 일구는 농부, 담벼락 너머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 고추 말리는 마당, 길가를 천천히 거니는 개. 이런 일상적인 장면들이 자연과 섞여 감성적으로 다가옵니다. 중간 구간에서는 돌담이 높아지고 길은 점점 구불구불해집니다. 해질 무렵 이 길을 걷는다면 길 전체가 붉게 물들며, 눈앞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가 됩니다. 숲이 많지는 않지만, 중산간 특유의 완만한 능선과 초지가 조용히 이어져 마치 명상하듯 걷게 됩니다. 길의 끝 고내에 가까워지면 다시 바람 속에 짠내가 섞이기 시작합니다. 멀리서 바다가 보이고, 해가 지며 어둠이 내릴 때쯤이면, 온종일 자연 속을 걸은 하루가 조용히 마무리됩니다. 특별한 관광명소는 없지만, 이 길을 다녀온 이들은 말합니다. “제주가 이렇게 조용하고 아름다울 줄 몰랐다”고. 그만큼 이 코스는 마음 깊은 곳에 잔잔히 남는 여운을 선사합니다.
중산간 올레길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유명 관광지가 있거나 SNS에 자주 등장하지도 않죠. 하지만 이 길은 ‘걷는다’는 행위의 진짜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나를 되돌아보고, 자연과 호흡하고, 속도를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걷는 시간. 13코스의 예술과 숲, 14코스의 깊은 숲과 정적, 15-B코스의 사람 냄새 나는 시골길. 각 코스는 저마다의 결을 갖고 있으며, 모두가 다른 감정으로 다가옵니다. 만약 지금, 마음이 지치거나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껴진다면. 이 조용한 중산간 길을 걸어보세요. 흙길 위를 걷는 동안 당신의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