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시간과 맛이 살아 있는 도시, 청주
충청북도의 심장이라 불리는 청주는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속에서 조용히 제 모습을 지켜온 곳이다.
고려의 숨결이 살아 있는 직지와 산성의 풍경,
도시 중심에 흐르는 문화의 결들.
그리고 구수한 청국장과 따뜻한 올갱이국밥 한 그릇.
이번 청주 여행은 화려하진 않지만 깊이 있는 시간들이었다.
문화재 앞에선 조용히 숨을 고르게 되고,
골목길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입으로는 청주의 정서를 맛보고,
가슴으론 그 도시가 가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글은 그런 청주를 직접 걸으며 기록한,
작지만 깊은 여행의 기억이다.
1. 청주읍성과 상당산성 – 고려부터 조선까지, 도심 속 시간의 방어선
청주는 오래된 도시다.
하지만 그 낡음이 ‘늙음’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묵직한 깊이’로 다가오는 건
이 도시가 잘 지켜온 역사 덕분이다.
청주읍성은 조선시대 도심을 둘러싸던 방어 성곽의 일부로,
현재는 일부만 복원되어 있지만
그 구조와 정문이 그대로 남아 있어 도시 한복판에서도 과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동문터와 북문지는 도시를 걷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풍경이라,
더욱 특별하다.
마치 길 위의 시간 여행처럼 말이다.
하지만 청주의 진짜 방어선은 역시 상당산성이다.
차로 15분 정도 외곽으로 나가면,
산속에 조용히 숨겨져 있는 이 성곽을 만날 수 있다.
산 전체를 휘감고 있는 돌담길은
걸을수록 그 규모와 정교함에 감탄하게 된다.
상당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의 형태는 조선 중기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철에 상당산성을 찾으면
단풍과 돌담이 어우러진, 영화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사람이 많지 않아
걷는 내내 나와 산성, 그리고 바람만이 대화를 나눈다.
숨이 차오르는 순간마다,
산 아래로 펼쳐지는 청주의 전경이 나를 위로해준다.
여기선 과거도 현재도 그리 멀지 않다.
2. 직지코리아와 청주고인쇄박물관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의 고장
청주를 이야기할 때 직지를 빼놓을 수 없다.
“직지심체요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구텐베르크보다도 앞선 이 위대한 유산이 바로 청주에서 인쇄되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마주하려면
청주고인쇄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상당구 흥덕사 옛터에 자리한 이 박물관은
작지만 세계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박물관 외부는 흙담과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전통양식으로
그 자체로도 역사 유적지처럼 느껴진다.
내부에 들어서면
금속활자본의 제작 과정, 당시의 목판 인쇄 기술,
직지를 둘러싼 국내외 자료가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실제로 활자를 조판하고 인쇄해볼 수 있는 체험관.
그곳에서 내가 찍은 한 장의 ‘직지’ 복사본은
이번 여행 최고의 기념품이 되었다.
청주는 매년 가을마다 직지코리아 국제페스티벌을 연다.
세계 각국의 인쇄문화가 이곳에 모여,
직지가 가진 ‘기록’의 철학을 공유하는 자리다.
만약 여행 일정을 잘 맞춘다면
이 페스티벌은 꼭 한 번 참여해볼 만하다.
역사를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찍고 보고 듣는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3. 수암골과 청남대 – 일상과 권력이 공존하는 문화의 양극
수암골은 한때 낙후된 산동네였지만,
이제는 청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 마을로 자리 잡았다.
벽화가 그려진 골목, 감성 카페,
독립 서점과 소규모 전시관이 모여 있는 이곳은
청주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다.
특히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청주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순간이 있다.
그 풍경 하나만으로도, 이 골목은 기억될 가치가 충분하다.
사람들은 이곳을 걷다 무심코 한옥집 처마 밑에 앉고,
커피 한 잔을 나누며,
도시의 리듬을 천천히 음미한다.
반면, 청주 외곽 청남대는
한때 ‘금단의 공간’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의 별장이었던 이곳은
이제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어
하루 코스로 걷기 딱 좋은 여행지가 되었다.
청남대는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한국 현대정치의 상징적인 장소다.
각 대통령들의 기념식수와 테마관,
산책로와 연못, 한옥 스타일의 본관까지.
무엇보다 이곳의 진짜 매력은
숲길과 강변이 어우러지는 자연 경관에 있다.
나는 대통령의 흔적보다는
그 산책로 끝에서 바라본 금강의 잔잔함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역사가 머물던 공간이,
지금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
4. 청국장, 올갱이국밥, 육거리시장 – 청주를 입으로 걷다
청주는 음식의 도시이기도 하다.
특별히 이름난 음식보다는
오래 먹어온 집밥 같은 음식들이 많다.
그리고 그 안엔 조미료보다 정성이,
화려한 플레이팅보다 투박한 맛이 있다.
청주에서 가장 먼저 맛본 건 청국장이었다.
직지문화공원 근처 작은 한식당에서
뚝배기에 담긴 청국장을 받았을 때,
구수한 향이 먼저 마음을 녹였다.
된장보다 진하고, 쌈장보다 깊은 그 맛은
어릴 적 외할머니 집 부엌을 떠올리게 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건 올갱이국밥.
충청도 지역 특유의 이 음식은
작은 다슬기를 넣고 푹 끓인 국으로,
속을 든든히 채워주는 청주의 아침 메뉴다.
한 숟가락 뜰 때마다
올갱이 특유의 쌉싸름한 향과 고소함이 입안에 퍼진다.
거기에 청양고추와 들깻가루를 살짝 얹으면
이보다 완벽한 해장국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놓칠 수 없는 곳, 바로 육거리종합시장이다.
이곳은 청주의 진짜 사람 사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마늘, 건고추, 생선, 잡곡이 진열된 가판대,
중앙에 자리한 분식집과 전집에서는
즉석에서 부쳐주는 녹두전, 김치전이 손님을 부른다.
시장 안 노포에서 먹은 수육과 국수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했지만,
그 날의 기억을 오랫동안 남게 만든 ‘진짜 청주’의 맛이었다.
청주의 음식은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그래서 더 진심이다.
그 음식들 속엔 누군가의 손끝, 계절,
그리고 오랜 시간을 견뎌온 도시의 정서가 담겨 있다.
결론: 청주는 느리게, 그리고 진심으로 걷는 여행지
청주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는 도시다.
크게 자랑하지 않아도
조용히 품고 있는 것들이 깊은 도시.
한 번쯤은 꼭 느린 여행을 해봐야 한다면,
그 출발점은 청주가 좋다.
성곽 위를 걷고, 활자 하나를 직접 찍고,
산동네 골목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시장 한켠에서 따뜻한 국밥을 먹으며,
우리는 조금씩 여행자의 속도를 되찾게 된다.
이번 청주 여행은 많은 것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충분했다.
그리고 그 ‘충분함’이야말로
진짜 여행의 기준이 아닐까 싶다.
다음엔 더 오래 머물고 싶다.
청주라는 도시가 들려주는 더 많은 이야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