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지만 품격 있는 여행, 선비의 고장 함양
함양은 외치는 법이 없는 도시다.
소리 내지 않고도 존재감을 전하는 이곳은
조선 선비의 정신과 뿌리 깊은 장터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고장이다.
흙냄새 나는 오일장 골목부터
붓과 책으로 세상을 가꾸려 했던 선비의 흔적까지.
시간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그 품격 속에 물들게 되는 여행지.
이번 함양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깊이 있는 하루’를 만나게 한 귀한 여정이었다.
1. 남계서원 – 조선 선비정신의 살아 있는 교과서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는
조선의 유학 전통과 교육 철학을 고스란히 품은 남계서원이 있다.
이곳은 1552년 조선 중종 때 세워진 서원으로,
국가가 공인한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직접 현판을 하사한 서원으로,
그만큼 교육·문화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은 곳이다.
남계서원은 퇴계 이황과도 깊은 연관이 있으며,
그의 유학 정신이 서원의 기본 이념에 반영되어 있다.
서원 입구 홍살문을 지나면
담장을 따라 단아한 기와지붕이 이어지고,
마루와 대청, 강당과 사당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다.
특히 강당에서는 과거 유생들이 글을 읽고 토론하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햇살이 마루에 비추고,
솔바람이 기와 위를 스치는 그 풍경은
조선이라는 시대의 단면을 지금 여기서 살아 숨 쉬게 한다.
조용히 마루에 앉아 있노라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가꾸고 가르쳐야 할지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되는 감정이 밀려온다.
서원이란 단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의 그릇을 닦는 곳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남계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지금도 유림들의 제향과 후학 교육이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선비문화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2. 선비문화축제 – 옛 정신을 오늘의 삶에 비추는 문화의 장
함양은 매년 봄이면 함양 선비문화축제를 연다.
단순한 지역 축제를 넘어,
선비정신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복합 문화행사로 평가받는다.
축제는 함양읍 상림공원 일대에서 펼쳐지며,
유생 복장을 입은 시민들이 거리 퍼레이드를 벌이고,
책 읽기 마당, 활쏘기 체험, 한지 만들기,
전통 서예·예절 교육 프로그램 등이 풍성하게 구성된다.
그 중심에 놓인 메시지는 ‘올곧음’이다.
남을 속이지 않고,
자기 수양에 힘쓰며,
세상에 덕을 베푸는 사람.
함양 선비문화축제는 그런 선비의 정신을
즐기면서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도록 기획된다.
어린아이들이 전통복을 입고 훈장님께 예절을 배우고,
젊은이들이 판소리와 국악에 흥을 돋우고,
어르신들이 가훈을 쓰며 삶의 자세를 나누는 그 모습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진짜 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축제의 정점은 밤에 열리는 상림의 선비 불꽃놀이다.
어두운 하늘 아래 펼쳐지는 불꽃과
전통음악이 어우러진 순간,
함양의 옛 정서와 현재의 감성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선비문화축제는 과거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정신을 지금 이 시대의 삶과 연결하며,
‘진짜 멋’이란 무엇인지 되새기게 하는 귀한 시간이다.
3. 함양 오일장과 전통시장 – 손끝에 전해지는 장터의 품격
함양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문화는 바로 오일장이다.
매월 4일, 9일마다 열리는 함양 5일장은
경남 서부권에서 가장 오래된 장터 중 하나로,
농민, 상인, 여행자가 모두 어우러지는 살아 있는 문화공간이다.
시장에는 제철 채소와 산나물, 직접 담근 된장과 고추장,
갓 잡은 민물고기, 손수 지은 방짜그릇까지
그야말로 손맛과 손재주의 결정체들이 가득하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장터 국밥집이다.
한우국밥, 선짓국, 콩나물국밥은
진하고 푸짐하면서도 가격은 착하다.
옛날 국밥솥에서 퍼내어 낸 국밥 한 그릇에
김치 한 점, 무채 한 숟가락 얹으면
함양의 민심과 식도락이 함께 담긴다.
시장 골목에서는 천으로 만든 고무신, 전통 베개,
손바느질된 생활용품들을 파는 할머니들의 좌판도 흔하다.
이 장면은 다분히 영화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상업보다 정(情), 이윤보다 품(品)이 살아 있는 공간.
함양장은 장보러 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가는 곳이다.
그 속엔 오랜 거래가 쌓은 신뢰와
손끝으로 전해지는 기술의 품격이 살아 있다.
그것이 함양 전통시장이 지닌 진짜 가치다.
4. 상림공원과 산삼 음식 – 자연과 인간, 공존의 여행지
함양에는 천년 숲이라 불리는 상림공원이 있다.
신라 진흥왕 시절, 고운 최치원 선생이 조성한 인공림으로
동양 최초의 인공 숲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이곳은 숲 자체가 거대한 생태공원이자
선비정신이 깃든 자연교육장이다.
봄이면 진달래, 여름엔 짙은 녹음,
가을엔 은행잎과 단풍,
겨울엔 눈꽃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무의 이름을 적어놓은 푯말,
아이들을 위한 자연놀이 공간,
그리고 조용히 책을 읽는 주민들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는 자연이 일방적으로 전시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느껴진다.
상림 숲을 둘러보고 나면
꼭 들러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산삼요리다.
함양은 예로부터 지리산 산삼으로 유명하며,
건강식 중심의 식문화가 발달했다.
지역의 산삼 전문 식당에서는
산삼비빔밥, 산양삼 갈비탕, 산삼정식 등을 맛볼 수 있다.
그 맛은 맵지도 짜지도 않지만
몸에 오래 남는 깔끔한 여운이 있다.
산삼 한 점이 입에 들어가면
향이 먼저 머리를 감싸고,
입천장에 감도는 단맛이 뒤따른다.
그 정갈한 맛은 마치
이 도시가 가진 기품과도 닮아 있다.
함양의 자연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물게 한다.
그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비우고 자연과 호흡하는 법을 배운다.
결론: 겉보다 속이 더 아름다운 도시, 함양
함양은 크지 않다.
눈에 띄는 관광지도 많지 않다.
하지만 이 도시는 조용히, 깊고 단단하게 여행자에게 말을 건다.
남계서원의 마루에 앉아 마음을 닦고,
시장 골목에서 손끝의 정을 느끼고,
상림 숲길에서 자연의 품을 걷는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은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만약 당신이
진짜 한국적인 풍경과 정신을 보고 싶다면,
함양은 그 여정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그리고 그 여운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당신의 일상에 오래 머물 것이다.